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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56회)

김세곤 (칼럼니스트)연산군, 임희재를 다시 국문하여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하다.

등록일 2019년09월02일 11시11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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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4일에 연산군은 임희재는 물론 그 아비 임사홍도 국문하라고 전교 했다. 이어서 임희재가 공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6번째 기사)
 

“신이 이목(李穆)에게 보낸 서한에 ‘이 세상의 허다한 일들을 구경하고 있다.’ 한 것은, 신의 편지 가운데 기재된 일을 지적한 것이요, 

‘들으니 그대가 장돈(章惇)의 아들 장전(章銓)을 잘못 건드려 성내게 했다.’는 것은, 이목이 일찍이 이극돈을 가리켜 소인이라 하여 장돈(章惇)에 비하였는데, 하루는 이목이 이세전을 만나서 ‘이자가 바로 극돈의 아들인가?’ 말하니, 이세전이 크게 노한 까닭이오며”
 

이목이 일찍이 이극돈을 소인이라고 비한 장돈(章惇 1035~1106)은 중국 송나라 신종 때 개혁가 왕안석(1021∽1086)의 당류(黨類)로서 나중에 왕안석이 소인으로 취급받자 그 역시 소인 취급을 받았다.   
 

임희재의 공초는 이어진다.
 

“물론(物論 여러 사람의 논의나 세상의 평판)이 심히 극성스러운데 선인(善人)이 다 갔으니 누가 그대를 구원하겠는가?’ 한 것은, 정석견 이하 여러 사람이 서로 잇따라 떠났기 때문에 이른 것이오며,”
 

정석견 이하 여러 사람이란 정석견, 강혼, 강백진, 권오복, 김굉필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조의제문을 지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문인이었다.
 

“‘부디 시(詩)를 짓지 말고 또 사람을 방문하지 말라. 지금 세상에 성명을 보전하기가 어렵다.’ 한 것은, 이목이 본시 망령된 사람으로 평시에 능히 광언(狂言)을 폭발하고, 또 주실(酒失)이 있으므로 신은 이목이 근심과 분함에 겨워 함부로 시(詩)를 지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정석견 등 여러 사람이 혹은 사직장을 바쳤다.’ 한 것은 이목이 평소에 정석견 등을 선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른 것이오며”
 

당시에 정석견은 동지성균에서 파직되었고, 강혼은 사직장을 올려 하동의 원님이 되었고, 강백진은 사직장을 올려 의령의 원님이 되었고,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나중에 조광조의 스승이 된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다.
 

이중에서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인 권오복’은  1495년 6월29일에 지방수령에 제수되었다. 1)


임희재의 공초는 이어진다.
“‘이철견·윤탄이 의금부 지사가 되었는데, 논간(論諫)해도 상이 듣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에 대간이 이철견·윤탄이 적합하지 않다고 논집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이른 것이오며,”
 

그랬다. 1495년 2월12일에 대간들은 이철견이 정호의 첩종을 빼앗아 간음하여 파직 당했고, 윤탄은 충청감사였을 때 무능했고 기생과 간통했으며 환속한 의초라는 승려와 부정한 금전관계를 맺어 임명을 철회하도록 탄핵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2월12일 1번째 기사)
 

“‘이극돈의 탐취(貪聚)한 사실을 방 써서 붙였다.’는 것은 누가 이극돈의 탐욕과 취렴(聚斂)에 대한 일을 써서 종루에 방 붙였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른 것이오며, 돈(墩)자를 돈(惇)으로 쓴 것은, 이목이 이극돈(李克墩)을 장돈(章惇)에게 비한 까닭이옵니다.
 

‘저 또한 수경(數頃)의 밭을 충주·여주의 지경이나 혹은 금양(衿陽) 강가에 얻어 수십 년의 여생을 보내고 다시는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겠다.’ 한 것은, 신의 부친이 서울에 계시므로 진실로 시골에 돌아갈 생각이 없사오나, 다만 이목이 꾸지람을 입고 밖에서 귀양살이를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위안하려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오며,

그대도 역시 다시 올라올 생각을 두지 말고 공주의 한 백성이 되어 국가를 정세(丁稅)로써 도우라.’ 한 것은, 이목의 성질이 본시 광망(狂望)하기 때문에 신은 다시 서울에 와서 중한 죄를 범할까 염려되어 이른 것입니다.”
 

임희재의 공초를 다 읽고서 연산군은 말했다. 
 

“지금 임희재의 공초를 보니, 그 편지의 뜻과 상반된다. 그 편지에는 이극돈을 소인이라 이르고 또 나랏일을 그르게 의논한다 하여 충주·여주의 지경으로 물러가 눕고 싶다고 했는데, 곧 ‘이목을 위안하기 위해서 그랬다.’ 하고, 또 편지에는 ‘그대도 또한 다시 올라올 생각을 두지 말라.’ 하고서, 공초에는 ‘그가 서울에 와서 죄를 범할까 염려되어 그랬다.’ 하니, 그럼 지금 서울에 사는 자는 모두가 죄를 얻었단 말이냐?
 

사실 임희재의 공초는 궁색했다. 연산군의 지적대로 앞뒤가 안 맞은 부분이 있었다.
 

연산군은 전교했다.

“임희재를 다시 국문하라. 방금 군소배(群小輩)가 결탁하여 붕당(朋黨)을 만들어 다투어 재상을 비방하고 국가의 일에까지 미치니, 마땅히 통렬히 징계하여 그 풍습을 개혁하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4일 6번 째 기사)
        
군소배가 결탁하여 붕당을 만들어 다투어 재상을 비방하고 국가의 일에 까지 미쳤다는 연산군의 전교는 김일손의 사초에서 시작된 사건은 김일손 혼자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었다. 일군(一群)의 집단이 붕당을 결성해 연산임금과 재상을 비난한 조직적 범죄로 판단한 것이다. 2)

사진 1 연산군과 거창군 부인 신씨 묘 (왼쪽이 연산군 묘이다)

사진 2 ‘상설도 해설’ 표지판


 
1) 한편 연산군은 7월17일에 임희재가 편지에서 언급한 선인(善人)이란 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7일  5번째 기사)


2) 김범, 연산군, 글항아리, 2010, 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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